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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청춘의 주인공들

[청춘의 주인공들 ① 슬램덩크] 자아의 재활치료 중인 청춘들이 있다면

by Mellowee 2012. 10. 25.






 

 


청춘의 주인공들 #01.

[청춘의 주인공들 ① 슬램덩크] 자아의 재활치료 중인 청춘들이 있다면

작가는 왜, 백호에게 재활치료를 보냈을까?


 초심자의 행운이라는 말이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말인데, 뭐든 처음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행운이 따른다는 뜻이다.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야말로 초심자의 행운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할 줄 아는 거라곤 주먹 쓰고 오락하는 게 전부였던 낙제생 강백호는 어느 날 한 떨기 백합같은 소연이에게 한 눈에 반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서태웅 보다 뛰어난 농구 에이스가 되리라!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몰랐던 소년에게 처음으로 잘 하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이 생겨나는 순간, 강백호의 자아는 새로운 관문에 들어선다. 그리고 우주는 희한하게도, 그의 천진한 결심을 도운다. 농구 입문 3개월 만에 리바운드의 제왕으로 인정 받고, 전국의 농구 인재들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주전 멤버로 성장하는데, 모든 게 그야말로 만화같다. 


 하지만 강백호의 진짜배기 행운은 훌륭한 동료들을 만난 점에 있다. 전국제패를 함께 일굴 동료들을 기다리며 홀로 정진해온 채치수, 슬럼프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재기를 노리는 비운의 천재 정대만, 일찌감치 농구의 재능을 발견했으나 단신 콤플렉스를 극복해야만 하는 송태섭까지. 자신이 원하는 바를 분명히 알고 전진하는 농구 천재 서태웅도 빼놓을 수 없다. 모두 강백호가 농구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라서 용감무쌍한 것과는 다르다. 자신이 왜 농구를 잘 하고 싶은 지 일찍이 인지하고 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승부의 세계를 혹독히도 경험해 본 선험자들이다. 이들은 백호와 독자들에게, 욕심나는 미래를 찾은 사람이 감당해야하는 자세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고 독자와 함께 성장해 나간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응원하게 됐던 캐릭터, 정대만



 


채치수는 기다린다. 같은 꿈을 이루어줄 동료들이 나타나 줄 때까지.


 

 사실 백호가 가진 초심자의 행운은 그 생명이 그리 길지 않다. 난생 처음 갖고 싶은 것을 알게 된 순간 강백호가 맞닥뜨린 과제는 끝없는 드리블 연습과 골밑 슛 연습. 버티기의 시작이다. 금방 누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서태웅의 스킬은 넘사벽에 가깝고, 슬램덩크로 전국제패의 영웅이 되리라 생각했던 자신의 천재성은 전국에서 줄세워도 풋내기로 분류될 뿐이다. 자기는 비밀병기라고 여겼던 백호도 속으로 얼마나 소심해졌겠는가? 헌데 그것은 정대만이나 송태섭같은 주변 동료들이 이미 겪어왔던 일이다. 정대만은 불운의 독에 빠져 시간을 낭비했고, 송태섭은 타고난 한계를 순응하느라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 인생에도 처음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았을 때나 꿈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 자신이 천재라고 믿는 시절이 한번쯤은 있었다. 인생의 주인공은 나고, 네 인생의 주인공도 나라고 생각했던 시절. 헌데 독자들 대부분은 초보 천재 강백호만큼 용감무쌍하기 보다는 이미 현실의 좌절과 결핍을 경펌해 봤거나 받아들이는 중인 데 가까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역시 천재라는 백호보다 사실은 농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며 울부짖는 앞니 빠진 정대만이 더 애잔하다. 곧이어 이들의 실패가, 현란한 패스와 3점 슛으로 자기 극복을 증명해낼 때, 우리는 이 아름다운 만화가 인생의 고전이 되리라 일찍이 예감하고 마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산왕전의 승리 뒤에, 결코 믿고 싶지 않은 천재박명의 결말이 야속한 것도 같은 이유다. 결말은 잔인했다. 북산고의 전국제패 실패가 어쩌면 반전이었다. 서태웅은 주니어 대표가 되는 데 성공했지만, 정대만의 재기도 아직은 염려가 되고 채치수의 프로 입단이 좌절된 것도 억울하기만 하다. 심지어 강백호는 입단 4개월만에 부상으로 재활 치료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엔딩이란 말인가! 달콤했던 초심자의 행운이 처참하게 무너지고, 수많은 슬램덩크 키즈들은 내 인생의 마지막페이지도 이렇게는 억울하다는 듯이 있지도 않은 슬램덩크 2기에 대한 숱한 염원들을 뿌렸다.


  그러나 이 아름다운 만화에서 가장 슬램덩크 다운 이야기는, 바로 그 잔인하지만 의미심장한 결말이다. 초심자의 행운이 끝난 뒤에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사실 슬램덩크를 깊은 팬심으로 읽어 온 팬들이라면, 백호가 과거의 정대만처럼 아마 슬럼프에 빠지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을 거다. 채치수처럼 때를 기다리며 묵묵히 재활에 전념해도 좋고, 송태섭처럼 자신이 처한 현실를 인정하며 다른 장점을 계발해도 좋다. 백호가 지난 4개월 동안 만난 동료들에게서 땀내 나게 배워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아주 아름다운 질문과 대답이었을 것이고, 이 코트 위의 땀내처럼 자신들의 증발하는 초심자의 행운을 붙들고 싶은 독자들을 위한 아름다운 결말일테다. 


 슬램덩크의 해피엔딩을 결정하는 것은 결국 독자들의 태도가 아닐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감당할 몫을 책임지고 난 뒤라면 코트 위로 복귀하는 건 시간 문제고, 그것은 우리 인생의 해피엔딩에도 마찬가지다. 초심자의 행운을 지나고 인생의 이른 좌절로 재활 치료중인 젊은이들이 있다면, 어쨌거나 필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무대로 돌아가는 게 아닐까. 돌아갈 코트가 농구 코트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전국 무대에서 북산고는 주인공이 아니었지만, 슬램덩크에서는 북산고가 주인공이었다. 살다보면 내 삶의 진가는 지금 당장의 타인과의 승부의 승리 여부로 판가름 나는 게 아니다. 스스로가 반드시 비밀병기라는 사실을 믿고 끝까지 버티는 데에 있다. 그것이 끝없이 동료를 기다리는 일이든, 슬럼프를 극복하는 일이든, 자신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는 일이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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