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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Couch Surfing in Europe

잘 먹고 잘 사는, 자신감으로의 초대

by Mellowee 2016. 12. 21.

Tours, France


Tours, France


Tours, France



Trip to

Typical French Style




"What do you prefer for the evening, 

typical french food at home or in a nice typical restaurant?"


말만 해! 내가 너에게 프랑스 저녁이란 무엇인지 알게 해줄게!


"Are you a vegetarian??? (important) 

would you like to eat something special, to taste something? 

INVERSELY, Is that any food you hate?" 


너에게 좋은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어. 답장 기다릴게



메일함에 엘로디의 쪽지가 도착했다. 엘로디는 들뜬 게 분명하다. 프랑스에서 만나기로 했던 5명의 호스트들 중에서 가장 많은 쪽지를 주고받았던 호스트가 바로 Tours에 사는 엘로디다. 총 7통의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보통은 2-3번의 메시지를 주고받고 주소를 교환하거나, 만나는 장소나 시간에 대해서 확정 짓고 현지에서 얼굴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았다. 하지만 엘로디는 그보다 디테일했다.


엘로디는 우리가 Tours에서 만나는 방법에서부터 내가 역사를 나가서 엘로디의 마중을 맞이할 때까지의 세세한 동선을 알려주었다. 마치 가이드북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틈틈이 내가 어떤 이유로 프랑스를 오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마치 극진한 손님을 대접하려는 듯이 자신이 궁금한 사항들을 묻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 여러 통의 주고받은 메시지들 틈에서, 가끔씩 여행자인 나보다 더 카우치서핑을 기대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는 점이다. 알고 보니 그녀에게는 내가 첫 번째 카우치서핑 손님이라고 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것뿐만 아니라 카우치서핑이라는 문화에 직접 참여해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내가 몇 시 열차를 타는지 알려주면 그녀가 역사 근처에서 나를 데리러 나오기로 했다. 


파리에서 트루로 가는 기차 안에서 생각했다. 그녀와의 카우치서핑은 다른 호스트들과는 왠지 다를 것 같다고. 이제 새로운 사람, 새로운 그 사람의 집에 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그다지 없다. 의외로 나쁠 수도 있거나 생각보다 훨씬 좋을 수도 있을 것을 안다. 그럼에도 새삼스럽게 다시 설레려고 한다. 카우치서핑을 하면서 누군가의 카우치를 옮겨 다니는 동안, 그야말로 여행 속에 여행이 있는 셈이었다. 


한 시간 여쯤 기차가 달렸을까, 나는 엘로디와 카우치서핑 메시지로 주고받았던 약속 시간에 맞춰서 무사히 트루(Tours) 역 기차역에 도착했다. 엘로디와 만나기로 했던 역 앞으로 걸어갔다. 장난기 가득한 궁금증이 일었다. 어떤 사람일까? 어떤 집일까? 배낭을 메고 있는 아시아 여자애인 나는 누가 봐도 여행자다. 그 사이 검은색 소형 차가 내 앞에 도착했다. 조심스러운 클락센을 소리가 들린다. 유리문이 내려갔다. 


"Hey! Sehee!"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호스트, 바로 그녀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중심지, Tours 



엘로디는 직접 승용차를 몰고 나를 마중을 나왔다. 그녀의 호의에 첫 만남부터 기분이 좋아졌다. 금발머리에 하얀 피부, 그리고 어쩐지 여성스러운 듯 상당히 야무질 것만 같은 반듯한 콧대, 하지만 경쾌하고 싹싹한 태도는 그녀의 카우치서핑 메시지가 왜 항상 그리도 세심하고 길어야 했는지를 납득하게 했다. 


친절한 그녀는 내게 집으로 함께 가기 전에 Tours 시내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이번 카우치서핑을 단단히 준비한 게 분명하다.


"Tours는 잘 모르지? Paris보다 대단한 것들이 많아." 


사실 Tours(트루)는 인기 있는 관광도시는 아니지만 유서 깊은 곳이다. 프랑스 전역에 5000개의 대저택을 포함한 성이 있는데 이 중 80개 정도가 트루의 르와르강 근처에 있다. 관광객이 트루에 들르면 주로 고성 투어를 한다고 한다. 아름다운 성들은 우리가 유럽의 중세시대를 상상할 때의 고풍스럽고 평화로운 그림 그대로다. 


이러한 고성들이 많은 이유는 트루(Tours)라는 지역의 특수성 덕분이다. 역사 속에서 트루는 15세기 중세 프랑스의 수도였고, 그 이후로 많은 문화와 종교적 예술을 꽃피우며 프랑스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여겨졌다고 한다. 지금 프랑스어의 표준이 이곳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Cathedrale St-Gatien


* Tours 초대 주교였던 성 가스티앙의 이름을 따서 만든 웅장한 건물이다. 

한 차례 불이 나서 소실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1235년부터 약 3세기에 걸쳐 재건되었다. 




엘로디 & 데미안


간단한 Tours 시내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엘로디의 집으로 곧장 향했다. 여기서 살아본다는 것은 내가 겪어온 것과 얼마나 다른 느낌일까? 철없는 감상에 젖을 때쯤, 도시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시내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차를 타고 10여분 달리다 보면 소형 아파트 밀집 지역이 나온다. 


Tours, France


엘로디의 아파트


사실 니나의 집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카우치서핑을 하면서 다양한 유럽의 연립주택을 만나는 것도 꽤나 흥미롭지 싶다. 어렸을 때는 유럽을 떠올렸을 때, 잔잔한 전원에 목조 주택을 짓고 2층과 마당을 누리는 모습을 줄곧 떠올렸다. 하지만 이런 독립 형태의 주택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유럽의 특정 도시 중에서도 중산층의 특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땅의 경제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은 교외나 시골에서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2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 건물에 살더라도, 문을 열면 저 마다의 인생이 100인 100색이듯이 카우치서핑 호스트들의 보금자리도 마찬가지다. 제각각의 멋이 다르다. 카우치서핑으로 만나게 되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외국 여행 애호가들의 면면은 연립주택이든, 단독 주택이든 그들의 문을 열고 들어선 바로 그 공간에서 드러난다. 


엘로디의 집은 나에게 더욱 그런 즐거움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프랑스인은 원래 이렇게 인테리어에 공을 들이는 건가? 하고 놀랄 정도였다. 마치 콘셉트 하우스 같아 보였다. 일단 엘로디의 집은 일단 붉은색 아이템으로 가득 차 있었다. 소파와 커튼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접시와 심지어 주방의 그릇들, 국자, 주걱, 볶음 용 젓가락까지 붉은색이었다. 




Elodie's place


Elodie's place


Elodie's place





그 틈틈이, 어디서 저런 물건들을 구했을까 궁금할 수밖에 없는 형이상학적인 패턴들의 패브릭이 가득했다. 집안 전체적으로 낮은 밝기의 조명은 그 붉은 기운을 받혀주려는 듯 어우러졌다. 어쿠스틱 기타 위에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비치 패도라가 올려져 있었을 정도로, 모든 집의 물건들이 연출적이었다. 소파도 커튼도 조명도 붉은 색인데 주방의 모든 소품까지 붉은 색으로 깔맞춤 되어있다.


이렇게 어쩌면 자신의 취향에 꼼꼼한 것을 넘어 까다로울 수도 있겠다 싶은 엘로디를 보며 그녀의 남자 친구가 더욱 궁금해졌다. 엘로디는 그녀의 둘도 없는 여행 짝꿍이자 사랑은 남자 친구, 데미안과 함께 살고 있다.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하는 그는, 초등학교 선생님. 차분하고 과묵한 편인데 음악을 좋아해서 집에도 그가 수집한 LP가 가득하다. 반면에 엘로디의 직업은 예술치료사. 비슷한 듯 무척 다르다. 


"여기는 나의 남자 친구이자, 여행 파트너이자, 룸메이트인 데미안." 


엘로디는 데미안을 남편이라고 생각하지만 남편이라고 소개하지는 않는다. 남자 친구라고 소개한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평생 같이 살 것 같다고 말한다. 그녀에 따르면 둘은 파트너다. 그런데 데미안이라는 이 남자, 너무나 과묵하다. 대화가 오고 가면 낄 줄 모른다. 엘로디와 함께 집안 곳곳을 돌아보면서 여러 가지 아이템에 대해서 물어봐도 데미안은 먼저 말문을 여는 일이 없다. 신경이 쓰인 나머지 내가 먼저 "데미안은 생각이 어때?"라고 물어보면 엘로디가 다시 "데미안 생각은?" 물어봐야 그제야 대답을 한다. 


그런데 나는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정확히 노르웨이 잉그리드의 집에서다. 잉그리드의 남자 친구인 크리스틴은, 내가 맛있게 만들어준 한국식 쪽파 무침을 한 자리에서 클리어하면서도 고맙다는 말을 내가 아닌 잉그리드를 통해서 전달했다. 그런 남자들의 과묵함이란, 모르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이나 경계에서 우러나는 태도는 아니다. 본디 성격이 내향적이기도 했고 낯선 사람과 격의 없이 말을 나누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의 순수한 수줍음에서 묻어나는 어색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데미안의 과묵함은 편안하다. 오히려 자신의 성격과 다르게 일부러 수다스러움을 포장하는 사람들은 불편하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공교롭게도 내가 카우치서핑으로 만난 여성 호스트들의 남자 친구들은 모두 과묵했던 터라, 여행하는 잠시 동안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진취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여성과 찰떡궁합은 과묵하고 차분하면서도 그들을 가장 잘 포용하고 보완해줄 수 있는 스타일인 걸까? 정답은 모르겠다. 어쨌든 잘 맞는 짝이라는 것은 같은 성격, 같은 취향인 것보다 둘의 합이 맞는 하모니에 있는 게 맞겠다는 생각을 한번 더 하긴 했다. 



Bien vivre et du bien manger 



센스 넘치는 엘로디의 집안을 구경하고, 우리는 근처 대형 마트로 가서 장을 보기로 했다. 티피컬 한 프랑스 식사를 준비하겠다는 엘로디에게 나 역시 한국식 가정식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다. 메뉴가 많으면 어떠랴. 식탁은 풍성하면 좋은 거다. 한 번도 한국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던 엘로디도 반기는 눈치다. 정체불명이긴 해도 한국사람이라면 '그래 이건 제육볶음과 불고기의 사이쯤 되겠구나! '싶어 할 만한 요리는 여행할 때마다 내 주특기였다. 


다행히 Tours에도 아시안 마트가 있어서 필요한 식재료를 어렵지 않게 구했다. 볶음 용 고기를 대신할 베이컨 약간, 송이버섯 많이, 당근 적당히, 양파 많이를 두둑이 챙겼다. 마늘만 있으면 요리는 맛있을 거다. 엘로디네에도 마늘은 충분하다. 장을 보고 돌아오니 엘로디는 평소에도 이렇다는 듯 아주 능숙하게 분주해지는 모습을 보여줬다. 


일단 프랑스 디너 준비에 어울리는 끈적끈적하지만 빠른 템포의 음악을 튼다. 그리고 그 음악에 리듬을 맡긴 듯이 흥얼거리다가 또 몸을 흔들었다가 하면서 오븐을 예열한다. 좋아. 나는 지금 프랑스의 흔한 월요일 저녁을 보내고 있는 거야. 그녀는 나의 낯설어하는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러 개의 빵을 굽고 데미안과 속닥거리더니 또 오븐 속의 요리를 점검하곤 했다. 


그 사이 그녀는 카메라를 가져와 주방의 풍경을 기념하기도 했다. 흥이 많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테이블에 앉자 식탁이 가득 찼다. 접시가 쌓이고, 그 옆으로 메인 요리용 포크와 나이트 샐러드용 포크가 촘촘히 자리를 잡았다. 생수를 담는 컵, 따뜻한 얼그레이 티를 담는 컵 종류도 다르게 놓아준다. 프랑스 여자의 면모가 여기서 드러나고 있는지도 몰랐다.



테이블이 각종 식기로 가득 찼다



그녀가 예고했던 프랑스 디너는 이런 것인가. 그녀의 부지런한 움직임은 마치 위기의 주부들에서 전통적인 가정 문화의 격식과 품위를 추구하는 캐릭터, 브리 밴디캠프와도 같은 완벽주의적인 모습이었다. 그런 클래식한 모습에 경쾌한 흥까지 더한 모습이 바로 엘로디였다.


드디어 엘로디가 식전 빵을 내주고, 빵을 다 먹으면 세 사람의 접시는 모조리 새 것으로 바뀌었다. 본 아베 띠. 본 아베 띠! 그다음에야 이름은 들으면서 잊었지만(!!) 프랑스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닭고기 요리라는 먹음직한 메인 요리가 나왔다. 우리나라로 치면 백숙이나 통닭구이 정도의 음식일 거다.


테이블에는 만든 한국 요리도 빠지지 않았다. 이것 저것 먹다 보니 와인이 마시고 싶어 진 우리. 당연히 그녀는 물컵을 모조리 치우고 와인 잔을 꺼내온다. 아무 컵에나 와인을 담을 수는 없다. 주스도 마찬가지고, 탄산수도 탄산수만을 위한 컵이 따로 있다. "잘 살고 잘 먹는(bien vivre et du bien manger)"을 주요한 인생의 모토로 삼는 도시가 바로 투르(Tours)다. 이런 곳에서 그녀가 내가 만든 요리에 맛있다는 말을 연신 쏟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녀의 화려한 식도락 경험에 한국 여행자의 돌팔이 솜씨도 추가되는 거다.


배가 불러왔다. 그리고 이제 설거지를 하면 되지 않을까 싶을 대쯤, 오븐이 땡 하고 울렸다. 키쉬라는 디저트였다. 프랑스식 계란 파이라고 한다. 그녀는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자랑하듯 오븐에서 파이를 꺼내왔다. 알고 보니 카쉬에는 각종 야채나 기호에 따라 해산물을 넣을 수도 있다고 한다. 엘로디는 버섯과 당근을 듬뿍 넣고 올리브를 총총 넣어 구워낸 참이었다.


수많은 접시들과 컵, 포크들을 보며 설거지를 걱정하는 내게, 설거지는 디쉬 클리너의 몫이라며 말했다. 그녀가 다시 흥에 겨워 외친닿. Bien vivre et du bien manger! 그런 걱정은 먹을 것을 앞에 두고는 하지도 말라는 뜻 같았다. 늦은 밤까지 데미안의 솜씨로 만든 칵테일과 함께 이어지던 수다는 어느새 새벽까지 이어졌다. 엘로디와 데미안의 여행 얘기를 들으며 내가 놀라 하고 신기해한 것처럼, 내가 한국에 대한 소소하지만 그들에겐 놀라운 일상의 단편들을 이야기하자 그들 역시 신기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듯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다. 나의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새로운 견문이 되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한국인인 내가 노르웨이에 와서 혼자 유럽 곳곳을 카우치서핑을 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생각했다. 내가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라고 했다. 


"글쎄, 그러려고 노력하는 것일 뿐이야 엘로디. 난 모든 과정에 서 있는 걸."


나의 무심한 고백에 그녀는 웃어보였다. 그런 나의 아름답지만 아직은 실험적인, 무한하지만 불확실한 젊음에 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다고 했다.



"Trust in Life."


그녀는 자신의 삶이 힘들 때마다,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누군가의 오해를 살 때에 그 말을 기억한다고 했다. 이제 막 여행으로 세상을 알아가고 자신 안에 무언가를 깨고 있을 어린 내게 그녀는 자신의 지혜를 나누어주고 싶어 했다. 잘 먹고 잘 사는 모토의 도시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인생을 믿어보라는 그녀의 모토는 무슨 일이 있어도 너 자신을 믿으라는 말 같았다.


그러고보면 엘로디는 그녀가 살고있는 이 도시, Tours(트루)를 참 닮았다. 파리 못지 않게 고고하고 유서 깊은 도시는 먹고 마시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는 당당하고 유쾌한 모토로 자기만의 라이프와 사랑에 당당한 그녀의 아름다움과 어울렸다. 그녀의 우아하면서 활동적인 에너지, 그리고 자기 자신을 무척이나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더없이 친절한 태도로부터 나는 느꼈다. 그녀의 모토가 비단 그럴싸한 문장이로서가 아니라 그녀의 지나간 삶의 증거로서 쓰였다는 생각을 말이다. 


새벽까지 이어진 칵테일 토크가 끝나고, 나는 그녀가 마련해준 손님방으로 안내되었다. 사실 엘로디의 섬세한 배려에 놀란 적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녀가 내게 카우치라고 소개해준 방을 봤을 때는 더더욱이 몸 둘 바를 못 둘 정도로 놀라게 되었다. 


그녀의 집 한 켠에는 여느 호텔방 못지않게, 침구도, 가구도 거의 새것과 같은 모습의 작은 방이 카우치서핑 게스트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손님방이라고 했다. 낮에 집에 들어서자마자 한번 둘러봤던 방이었긴 했지만 밤이 되어 다시 들어가니 다시 한번 더 놀라웠다. 온통 붉은빛으로 통일되어 있었던 그녀의 집안 전체와 달리, 손님 방은 푸른 식물의 연두색깔과 코발트블루로 깔맞춤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엘로디가 꾸민 손님방, 아니 오늘은 내 방.


보통 카우치서핑을 하면 알겠지만, 이런 호스트는 많지 않다. 카우치서핑이란 낯선 여행자들이 낯선 일상에 잠시 머물다 다녀가는 것이다. 관광객이 민박집에 머무르는 것과는 다른 거다. 쓰던 방을 내어주거나, 손님용 타월 정도는 본인들의 편의를 위해 준비해두는 경우야 많겠지만 이렇게 별도로 인테리어까지 고민해서 꾸며진 카우치서핑 룸이 있는 집은 드물 거다. 


보통은 카우치에 마른 담요 하나 만으로도 여행자가 느끼는 감사함은 충분한 건데, 이렇게 과분한 방 앞에 내 기분이 오죽했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방 역시 엘로디 답지 싶다. 꼼꼼하고 스스로에 대한 기준이 높은 엘로디로서는, 하룻밤 묵고 떠나게 될 외국인 여행자 조차도 아무렇게나 재우는 건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감각과 테이스트가 용납하는 수준에서 행복감을 주어야 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잘 먹고 잘 사는 게 모토인 사람의 일사에 발을 들여놓으니 내 삶까지도 잘 먹고 잘 사는 삶의 질이 저절로 올라가는 느낌이다. 단 하루, 단 하룻밤일지라도 말이다.


널찍한 침대 위에는 종류별로 수건들이 놓여있었다. 이런 새심 하고 엄격한 여자 같으니. 오늘 내 가방에 들어있는 스포츠 수건과 침낭은 오늘 밤 쉬어도 되겠다 싶다. 호텔에 온 것은 아닌지, 감개무량 해지려는 틈에 그녀가 Good night! 하고 방문을 닫고 나간다. 가슴 어딘가에 활짝 열려있던 마음의 현관문이 고요히 닫힌다. 어느새 오롯이 나만을 위한 아늑한 휴식 시간이다. 




취향은 

자신감이다 


그녀의 예쁜 손님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예쁜 손님방을 나와, 그녀의 예쁜 거실을 지나 예쁜 욕실을 쓰는 하룻밤. 작은 물건 하나를 고르더라도 자신을 기쁘게 하는 무언가를 까다롭게 선택했을 그녀의 꼼꼼함을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쓸어 보면서,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해본다. 


나도 나중에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집을 꾸며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저녁을 차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만으로 생활을, 인생을 꾸려보고 싶다는 그런 생각들을 강하게 했다. 그래 보니 이제야 알겠다. 그녀가 어찌 그렇게 카우치서핑 쪽지를 자신 있게 보냈는지. "Typical French Style"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그녀는 어쩌면 내심 "Typical Elodie Style"에 자신이 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Tours, France



그녀는 그녀 자신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삶에 임하는 태도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녀가 초대하는 카우치서핑 손님은 어쩌면, 그저 우연히 우리 집에서 재워주는 여행객과는 또 다른 의미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랑스럽고 당당하고 멋스럽게 살아온 그녀의 인생에 초대하는 일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음날 그녀는 이른 아침부터, 출근 전에 앙부아즈 지역의 고성들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데미안이 직접 운전을 하며 르와르 강가를 지나는 길, Francis Lai - A Man And A Woman (Un Homme Et Une Femme)라는 노래가 나온다. 엘로디의 흥얼거림에 따라 부르자 엘로디가 깜짝 놀랐다. 한국에도 이 노래가 유명했었냐고 묻는다. 당연하지. 우리나라에서는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조혜련과 서경석이 유행시킨 웃음 나는 노래지만 물론 <남과 여>라는 영화 OST로 더 알려져 있다. 


Tours, France


Tours, France


Tours, France


나는 그 노래를 그녀와 함께 따라 부르면서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은 학생인 내게 생활의 경험이겠지만 엘로디에게는 생활의 결과일 것 같다는 생각을 말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저녁 식사, 그녀의 식견으로부터 나오는 자신 있는 삶의 팁들, 안정적인 그녀의 파트너까지 그녀는 '최대한의 엘로디'로 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뛰어드는 모습이었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언제나 과정에 놓여있는 줄 알았다가, 그 모든 게 결론의 얼굴을 하는 때가 온다. 30대 말, 혹은 40대의 어느 순간이 그럴 것이다. 조금 더 이르거나 조금 더 늦을 지도. 그때 행복하고 싶다면, 과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엄격하게 택해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은 무엇인지, 내가 좋아하는 물건은 무엇인지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내가 매일매일 자고 싶은 잠자리의 행복감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같은 방식으로, 내가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인지 제대로 아는 것까지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찾고, 일궜다는 자신감이 된다. 그것을 취향이라고도 한다. 그 사소한 자신감과 취향은 따닥따닥 붙어있는 연립주택 안, 아니 어떤 도시의 흑백색 건물 안에서도 천 가지 색으로 펼쳐져있는 삶의 문화를 다르게 만든다. 


훗날 여행에서 돌아와 생각해보면 이것은 엘로디뿐만 아니라 다양한 카우치서핑 호스트들이 내게 알려줬고, 또 알려주게 될 가장 큰 삶의 팁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엘로디와 데미안이 내게 보여주려고 했던 투르 성은 그날따라 문을 열지 않았다.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 그랬을까? 연중무휴로 알고 있었던 고성 관람이었는데, 무슨 일이었을까? 터덜터덜, 그러나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커다란 성 같은 것은 보지 않아도 좋다. 엘로디와 데미안이 드라이브시켜주며 구석구석 보여준, 프랑스 포도밭의 주인과 석산에 지어낸 포도주 농가들을 구경하는 일도 충분히 멋진 일들이었다.


내가 스물세 살의 나이로서 바라는 인생의 모습은 사실 거창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대단한 직업을 갖거나 일확천금을 획득하는 일 같은 것으로 설명하긴 어렵다. 지금 내 삶이 세상을 바라보는 내 태도에 자신 있어지는 일이다. 최대한의 나로 온전히 삶을 운용하는 일 말이다. 


프랑스의 멋들어진 고성을 보지 않아도 괜찮다. 프랑스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유명한 식당에 꼭 가야 할 필요도 없다. 물론 그게 좋으면 그걸 멋지게 하면 된다. 다만 내가 지금 이 여행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인생의 얼굴도 내 취향으로 쌓이고 모일 테니, 그것에 정직하고 나다우면 그만이다. 그것이 엘로디의 빨갛고 붉은 키친 소품들이 보여주는 라이프 스타일과는 또 다른 모습, 나만의 취향과 색깔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고성과 구시가지를 돌아보고 엘리디의 집으로 돌아와 엘로디에게 노르웨이에서 가져온 초콜릿 선물을 건넸다. 그녀가 내게 보여준 성의에 비하면 한참 작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이 좋아하는 그녀를 보면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내가 너무 많은 신세를 진 것은 아닐까? 나도 그들에게 그들의 인생을 더 또렷하고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손님으로 기억될까? 어쩐지 아쉽고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은, 물질적으로도 혹은 정신적으로도 그들보다 내가 받은 게 더 많았기 때문일 거다.


남다른 프랑스 버거킹


Tours 역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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