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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Couch Surfing in Europe

짜파게티가 구한 파리의 기억

by Mellowee 2016. 12. 21.

Paris, France


Paris, France





바스락 

바스락

생존 본능 


이틀 전부터는 배낭을 멜 때마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난다. 3 일 전에 니나와 함께 파리에 있는 아시안 마트에 갔을 때,눈물나게 반가웠던 짜파게티 여럿을 냉큼 사다 배낭에 구겨 넣은 덕분이다. 지극히 생존 본능에 의한 선택이었다. 그때 나는 파리 여행이 끝나면 노르웨이 기숙사로 돌아가야 했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오슬로에는 짜파게티를 파는 곳이 없다. 게다가 파리의 물가는 노르웨이보다 의외로 친절했다. 그러니 바스락 바스락 가방이 짜파게티 포장지와 부딪치는 소리가 어찌나 든든하고 반갑던지. 재밌는 것은, 짜파게티의 쓸모가 오슬로로 돌아가기 전보다 훨씬, 빨리 발휘됐다는 거다. 


트루(Tours)에서 돌아온 밤, Trocadero역에서 샤이오 궁으로 나가는 1번 출구로 걷고 있을 때였다. 파리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고 싶어서 샤이오 궁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샤이오 궁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에펠탑 야경을 한 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곳. 낮에 일찍 들러 본 곳이지만 마지막 날인 오늘은 다시 한번 반짝이는 에펠탑을 보고 싶었다. 


그때 갑자기 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역시나 늦은 밤의 Trocadero 지하철 역 출구에는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밤 10시가 가까워 지는 시각. 모르는 척 무시하고 다시 걸은 뒤 얼마나 지났을까. 곧 다시 기척이 느껴졌다. 이상했다. 몸을 돌렸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뭐지? 찝집하게 안심을 하고 다시 걸었다. 바스락바스락. 바스락바스락! 엇? 이건 짜파게티 포장지에서 나는 소리잖아!


뒤 쪽으로 재빨리 몸을 돌렸다. 곱슬 흑발의 붉은 옷이 눈에 확 띄는 10대 소녀가 내 배낭의 지퍼를 1/4 쯤 내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서투른 소매치기였는지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며 빠르게 뒤돌아 뛰어갔다. 더욱이 놀란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녀가 뛰자 양 옆에 벽 뒤에서 숨어있던 서너 명의 아이들이 함께 뛰기 시작했따. 내 키보다 훨씬 큰 남자아이들도 보인다. 그들은 저쪽으로 뛰고. 나도 가방을 부여잡고 반대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파리에서 말로만 듣던 10대 소매치기 그룹을 만난 순간이었다. 


다섯 명이라니. 다섯 명이나 내 가방을, 그러니까 나를 노리고 있었다니! 가슴이 뒤늦게 쿵쿵거렸다. 한눈에 보아도 고작 10대들이었는데, 그 어린 아이들이 슬금슬금 내 뒤로 다가와, 둔한 가방을 타깃으로 조금씩 조금씩 지퍼를 열고 있던 것이다. 일단 발걸음은 재빨리 에펠탑을 볼 수 있는 샤이오 궁으로 향했지만 가슴은 계속 뛰고 있었다. 다리도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에펠탑은 예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소매치기 일당들은 악질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지갑이나 훔쳐 가볼까 생각했으니 다행인가 싶기도 하고. 짜파게티가 나를 살렸구나 싶은 순간이 분명했다. 짜파게티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내 가방은 투두둑 해체되어 꼴 보기 좋게 소지품을 도난당했을 것이다. 


사실 내 가방에서 가져갈 것이라곤 여행 중에 빨지 않은 옷들, 몇가지 세안제가 전부였고 지갑은 내 청바지 안 주머니에 있었기에 실질적으로 소매치기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에펠탑을 앞에 둔 가슴은 쿵쾅쿵쾅 뛰고 있었다. 사방의 모두가 무섭게만 느껴졌다. 혹시 여기서 호스트 집을 찾아갈 때 또 소매치기가 있으면 어쩌지? 소매치기 일당의 실체는 내게 소매치기 이상의 위험 요소를 상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사실 오늘 나의 호스트가 되어주기로한 샬롯은, 개인적인 일정 때문에 오후 11시에나 만날 수 있다고 했긴하지만,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만나 어딘가에서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Some young people were trying to pick my back

and I don't know what to do right now. 

그러니까 내가 너희 집에 좀 일찍 가도 되겠니? 


답장은 빠르게 도착했다.


Oh no! Don't worry sweetie. You are my guest! 

Nobody can hurt my guest! 

I will be waiting for you until you arrive here! 

내가 말한 그 역 앞에있는 맥도널드로 와. 

친구들한테는 먼저 집에 가야 한다고 말하면 돼. 기다리고 있을게!


문자를 보는데 찔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슴이 그제야 부유하던 비행기가 착륙할 장소를 찾은듯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졌다. 


파리를 여행하는 내내, 늦겨울 특유의 차가운 공기와 도시 전체의 청결하지 못한 인상, 어쩐지 무심해 보이는 파리 사람들의 얼굴 때문에 종종 위축이 될 때가 있었다. 소매치기에 대한 악명은 여기저기서 들어왔던 바, 괜히 혼자 무심한 현지인들을 경계했던 것도 나다. 그런데 제대로 그 소문의 실체를 경험해 버렸다는 생각이다. 그것도 마지막 날에. 


그러니 맥도널드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샬롯을 봤을 때의 반가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랑스운 입매에 줄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그녀. 파리의 마지막 밤은 샬롯의 집에서 보낸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어 



"원래 샤이오궁은 소매치기들이 좀 있긴하지.근데  요새는 다 어린 애들이야."


긴장했을 나를 위해 오히려 별일 아니라는 듯이 위로를 건네는 샬롯. 그녀는 남자친구 제르맹과 함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이름에서부터 프랑스 본토 사람의 느낌이 나는 두 사람이다. 샬롯 역시 카우치서핑 경험이 많은 편이었다. 그녀의 카우치서핑 스타일은, 평소에 카우치서퍼가 집에 오게 되면 극진히 대접하고 주말엔 함께 파리 여행도 기꺼이 즐긴다고 한다. 하지만 마침 샬롯이 나를 재워주기로 한 다음날은 그녀의 부모님이 두 사람을 만나러 지방에서 이른 아침에 오는 날이어서 그럴 수 없다고 했다. 날이 날이니 만큼, 아주 짧은 시간 내게 하룻밤을 재워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거듭 내게 양해를 구했다. 


부모님이 어느날 갑자기, 독립한 자녀의 집에 방문하는 일은 한국이나 프랑스나 자녀 입장에서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날인가보다. 하지만 이쪽도 미안하고 고맙긴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런 날이라면 카우치서핑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따뜻한 잠자리가 생겼으니 말이다.


사실 내 입장에서는 여러명의 카우치서핑 호스트들을 만나기 위해 일정을 쪼개고 쪼개다 보니 샬롯의 집에서는 하룻밤 쉬어가는 시간 밖에 내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도 했다. 호스트의 공간을 '공짜 숙박 장소'로 여기는 것보다는 새로운 사람의 터전에 머물며 그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떄문이다. 늦은 밤 도착해서 이른 아침 그녀의 집을 나서야 했기에 그저 잠자리만 신세지고 떠나는 카우치서퍼가 되는 건 어쩐지 실리적인 것만 취하고 사라지는 미안함이 든다.


"아 있잖아~ 내가 설거지를 못했어. 일단 마셔~ 문제는 없으니까."


샬롯은 깨진 컵에 급히 데운 코코아를 따라주며 부산스럽게 다시 부엌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부모님이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밀린 빨래와 청소를 해치워야 해서다. 그녀는 찬장에서 깨진 미키마우스 머그 컵을 꺼내어 내 품에 그저 안기듯이 내밀고는 다시 부엌으로 사라졌다. 트루(Tours)의 엘로디 집에서 극진한 귀빈 대접을 받고 온 터라 그녀의 색다른 환대(?)에 나는 조금 웃음이 났다.


아니 오히려 안심이 됐다. 그녀가 나를 오랫동안 본 친구처럼 격의 없이 대해주었으니까. 나는 다시 누군가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깨진 컵에 인스턴트 코코아를 데워 먹는 일 쯤이야 어제와 다르지 않게 평범하기만 한 누군가의 일상으로 말이다. 특별히 고상하거나, 특별히 위험할 것 없는 생활자들의 도심 속 풍경말이다.


거실에 앉아 샬롯의 자그마한 공간을 둘러보았다. 널부러진 책들, 어딘가 집안과 어울리지 않는 10년은 더 되어보이는 빨간 조명의 스탠드. 아무렇게나 심은 화분들, 10대 시절부터 모아온 듯한 LP와 CD들이 전혀 연출적인 요소라곤 찾아볼 수 없이 거추장스럽고 서툴게 쌓여있었다. 그야말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났다. 



Charlotte's Place and my bed




곧이어 샬롯의 남자 친구, 제르맹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카우치서퍼가 자신의 공간에 오기로 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가벼운 포옹, 그리고 입가의 주름이 쏟아질듯한 환한 미소. 흑발에 익살스러운 인상을 가진 제르맹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나를 냉장고로 잡아끌었다. 



"길 가다가 이런 사진을 주웠지 뭐야. 한국 애야? 일본 애야?"


"헐! 이건 한국에서 학교에 내는 증명사진이야. 이걸 어디서 났어?"


"왓? 우리 길거리에서 봤지. 재밌는 것 같아서 주웠어. ㅋㅋㅋ" 



냉장고에 붙어있는 사진은 교복 입은 한국 소녀의 증명사진이었다. 누군가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다가 지갑에 있던 사진을 잃어버렸던 게 분명했다. 우리로 따지자면 외국인 10대 소녀가 교복을 입고 찍은 증명사진 또는 여권 사진을 냉장고에 붙여놓은 셈이었다. 이런 사진을 도대체 왜 수집해 놓는 것인지 이 커플의 기괴한 흥미가 의심스러울 때쯤, 어느새 냉동실에 있던 인스턴트 케이크를 내미는 제르맹.



"내가 엊그제 먹던 거긴 한데, 되게 맛있어."


제르맹이 운을 떼고


"좀 오래되긴 했어도 냉동실에 있었으니까 괜찮아." 



샬롯이 맞장구를 친다. 두 사람은 차분하거나 진지하지는 않지만 누구든 유쾌하고 편안하게 대할 줄 아는 커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에 대한 호기심도 많아서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한국이나 나에 대한 이런 저런 질문도 얼마나 많던지. 어쩌면 그래서 이름모를 한국 10대 소녀의 증명 사진도 어디서 보물 찾기라도 성공해낸듯 주워다 냉장고에 붙여놓은 것이 아닐까?


사실 파리에서 보내는 밤은 마지막 트루(Tours)에서 올라와 혼자 파리의 야경을 구경했던 터라 지쳤던 시간이었다. 게다가 소매치기까지 만났으니 잔뜩 경직이 되기도 했을 터. 하지만 그 마지막 밤의 끝에는 이렇게 격의없고 자유분방한 애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선물처럼 있다.




Charlotte & Germain



이런 집에서면 바로 한 시간 전쯤 만났던 소매치기 일당의 무서움은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만났던 이들이기에, 어느새 금방 찾아드는 밤. 다음날 각자의 바쁜 일정으로 부산스러웠기에 근처 펍에라도 가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해야했다. 하지만 집에 별다른 이불이 없다며 각종 담요와 담요들을 모아서 침대를 만들어주었던 샬롯과 제르멩의 귀여운 친절로 마지막 밤은 충분했다.





다시 없을

나의 첫번째 파리 


파리에 오기 전에, 누군가 파리는 생각보다 위험하고 더러운 도시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여행해보니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였다. 나는 진짜로 프랑스의 악명 높은 소매치기를 만났다. 여행 중에 한 번은 파리 지하철 역에서 중국인 관광객들을 향해 소리지르는 프랑스인 할머니를 만나기도 했다. 심지어 첫날 부터 카우치서핑 약속을 바람맞기도 했었지.


하지만 몽마르트르 언덕을 오르는 동네 버스를 더 또렷이 기억한다. 몽마르뜨에 가겠다는 동양인 외국 여자 아이 한 명을 제 때 정류장에 내려주기 위해서, 스무명 쯤이 타고 있던 버스를 멈추고 내 자리에 다가왔던 기사아저씨. "This is the bus stop you should get off."라고 말해주던 그 콧수염이 짙은 버스 기사 아저씨를 기억한다. 


노트르담 성당 앞에서, 한국 분이시냐는 뜬금없는 내 질문에 자신들이 머무는 민박집 주소를 알려주었던 한국인 여행자들도 기억한다. 무엇보다 호스트에게 바람맞은 나를 위해 함께 화를 내 주고, 의미있는 생일 파티 식사를 예약해주었던 니나 커플의 다정함은 어떠한가. 자신의 모든 노력을 다해 프랑스 문화란 무엇이다, 라고 보여주려고 노력했던 엘로디의 섬세함도 특별했다. 


그리고 나의 갑작스럽고 호들갑스러운 문자 한 통에, 바쁜 와중에도 마중 나와준 샬롯의 털털한 호의도 마찬가지다. 내게는 그들이 가장 짙은 파리의 기억. 짜파게티를 먹을 때마다 떠올릴 수 있는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살면서 언젠가 파리를 다시 들르게 되리라 강한 예감을 한다. 에펠탑은 혼자 보기엔 너무나 아름다워 반드시 사랑하는 사람을 이끌고 와 기념 사진을 찍게 만들 것이고, 파리 시내 곳곳의 페스츄리와 에그타르트는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어 먹으면 딱 좋을 그 만큼 달고 고소하다. 하지만 그때 다시 오게 될 파리는 이만큼 외롭지도, 동일한 모습으로 자유롭지도, 같은 이유로 감사하기도 어려우리라. 여행은 언제나 '떠남'의 다른 이유를 알게 하니까. 다시는 두 번 경험하기 힘들, 나의 첫 번째 파리를 떠난다.

 




Paris,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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