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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Couch Surfing in Europe

독일 S-Bahn에 앉은, 스물셋의 빚쟁이

by Mellowee 2018. 1. 21.

Adiós, Bamberg




나 대신

화 내주는

사람들


"Warte! Warte eine Sekunde!"



드레스덴으로 향하는 기차를 눈 앞에서 놓쳤다. 제 시간에 역에 도착해서 플랫폼 번호를 제대로 확인하고 기차가 들어오는 소리도 분명히 들었는데, 참 황당할 노릇이었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는 기차 문이 열리질 않았던 게 문제였다. 문이 열리는 곳까지 즉시 뛰어갔지만 이미 늦었다. 자동문 닫히는 속도는, 내 뜀박질보다도 빨랐다.


누굴 뭐라할 수 있겠는가. 외국인 여행자의 서투름에서 비롯된 해프닝일 뿐. 나중에 다른 여행자에게 들은 일인데 늦은 시간에는 열차들이 모든 문을 열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사람이 아직 안 탔다구요! 여기!여기!" 


굳게 닫힌 열차의 문앞에서 나 대신 화내주는 것은 초등학교 5학년쯤 되어보이는 독일 소년들이었다. 아이들은 기차 앞머리를 두들기며 냅다 소리를 질렀다. 소스스로의 바보같음과 당혹스러움에 주눅들기도 전에, 겨우 내 가슴 팍까지나 머리가 올려나 싶은 독일 소년들이 고레고레 기관사를 향해 소리를 질러주니 오히려 내쪽에서 괜찮다고 해야할 것만 같다.


고마웠다. 대여섯명의 소년들은 열차의 앞머리와 나를 번갈아 돌아가며 발을 동동 구르는 것으로, 독일은 결코 매정한 나라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었다.


- 독일 아이들은 정의롭구나. 

- 타인의 불운에 공감하고 도움을 줄 줄 아는구나. 


그러나 세상이란 감동과 정의, 융통성 같은 단어와는 무관하게 돌아가는 법. 아이들이 아무리 외쳐도 기차는 다시 열리지 않았고, 미안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그대로 가야 하는 길을 향해 우아하게 내달렸다. 


".....Sorry." 


너희가 왜 내게 미안하니. 오히려 고마운걸. 아이들은 짧지만 진심어린 말투로 미안하단 말은 남긴채, 나만 혼자 두고 떠나는게 민망한지 역 밖으로 냅다 뛰어 나갔다. 이제 해결은 오로지 내 몫이다.


"기차를 놓쳤어요? 그 티켓으로 다음 기차를 타봐요. 아마 타게 해줄거예요. No worries."


해결책이 뭐가 있을까 강구하려하기가 무섭게, 멀리서 이 상황을 지켜본 모양이던 독일 아줌마가 무심하게 한 마디를 건넸다. 


내가 들고 있던 밤베르크 -> 드레스덴행 기차표로 말할 것 같으면, 라히프치히 역을 거쳐 드레스덴으로 도착하는 환승 티켓인데 무려 34 Euro 나 지불하고 얻은 것이다. 이는 나름 카우치서핑으로 숙박비도 아끼고, 끼니도 마트에서 산 식재료로 요리한 것과 외식을 적절히 섞어 줄여 온 여행 경비의 큰 축을 차지하는 녀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기차표를 날리자니 솔직한 마음으로 속이 쓰리기는 했다. 그런데 이 티켓을 갖고 같은 행선지로 향하는 기차를 탈 수 있다고? 그저 믿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몰랐다. 이 또한 또 하나의 실수가 될 거라는 걸.




나 대신

값을 치르는

사람들



한참을 기다리다 불안과 기대를 동시에 안고 다음 기차를 탔다. 기차에는 늦은 시간 답게 자리가 거의 텅텅 비어있었고, 드문 드문 인기척이 느껴질 뿐이었다. 당연한 수순 처럼 자리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역무원이 우리칸으로 입장했다. 괜찮은 걸까? 하는 약간의 두려움이, 드디어 기차를 탔다는 안도감과 뒤섞여 나를 간지럽게 했다. 


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을까? 불명확한 행운에 기댄 것이 문제였다. 티켓 검사를 하던 역무원에게 놓친 기차의 티켓은 그저 흰 종이에 불과했다. 그는 이 티켓으로는 내가 원하는 행선지로 갈 수 없다고 했다. 애초에 나의 기대는 어리석었던 거다. 


'그 아줌마가 될 거랬는데...' 


역무원은 내가 구매한 티켓보다 지금 결제할 티켓이 가격이 나가니 차액을 지불해야한다며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과연 그는 성실한 직업인이었다. 자신의 책무에 충실하게, 표정까지 직업의 본분과 일치되어, 어떤 협상의 여지도 없이 나에게 정당한 대가를 치를 것을 요구했다. 


티켓 검사를 할 때 나는 이미 티켓을 구매했고, 기관사의 실수로 열차를 탑승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초지종을 설명한 터였지만, 당연히 선처를 얻게 될리가 없었다. 나로서도 더 이상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 뒤늦게 실수를 후회하고, 현장에서 차액을 지불하고자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현금이 없었다는 거다. 역무원은 어쩐 일인지 절대 카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럼 어찌할 수 없네요. 여권을 보여주셔야 합니다."


"네? 여권이요?"

 


상황은 점점 어둡고 불리하게 돌아갔다. "정말 제가 일부러 안 내겠다는 건 아니에요.. 신용 카드는 있어요!"  지금에야 여권으로 신원 확인을 빨리 하는 게 괜한 의심을 사지 않고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지만, 경험이 부족한 23살의 내 머릿속에는 수많은 공포 상황이 저릿저릿 밀려왔다. 


내 여권 정보가 독일 당국에 블랙리스트 비슷한 것으로 등록되어 영원히 기록에 남는다거나, 일정보다 미리 여행을 끝내야 한다거나, 아니면 심각하게는 국제 전과자라도 되는 것인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력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피어났다. 당황스럽고 걱정되는 마음에 여권 꺼내기를 쭈뼛 쭈뼛 굴다보니 1분이 한시간인 것처럼 흘러갔다.




"제가 낼게요. 16유로라고요?"



그때였다. 오, 나의 해결사!


혼자 여행 중인지, 집으로 돌아가는지, 호탕해 보이는 여자 승객 한명이 유창한 독일어로 상황을 정리해줬다. 그녀는 흔쾌히 나 대신 유로를 꺼내서 티켓 값을 결제했다. 역무원은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듯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있는 칸을 지나갔다. 정말 본분에 충실한 사람이 분명했다.


그 사이 나 대신 16유로라는 갑작스러운 지출을 한 그녀는, '감사는 필요없어' 라는 태도로 다시 자기 일에 몰두 했다. 나를 더 무안하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순간 고마우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녀에게 보답해줄 길이 없었고, 이런 상황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다 빨리 제 선에서 끝내버린 그녀에게 어쩐지 창피한 기분도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저 땡큐만 연발했다. 


배낭에 이렇게 누군가에게 신세질 경우를 대비해, 초콜릿이라도 챙겨뒀으면 좋았으련만! 난 정말 보답으로 줄 만한 게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어서 부끄러웠다.


문제는 나를 구제해준 이 호의가 너무나 쿨해서 오히려 민망했다는 것이다. 그녀의 호의에는 '이쯤은 제게 별거 아닌걸요. 나도 여행할때가 생각나서요.' 라는 식의 자기애도 없고,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기뻐요. ' 라는 식의 공명심도 없었다. 그런 생색내기 없는 호의에, 나는 충분히 고마워할 틈도, 미안해할 틈도 없어서 더욱 민망했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행이 끝나고 꽤 오랫동안 드문 드문 일종의 부채의식에 사로잡혔다. 그녀에게 어떻게 갚으면 좋을까? 명백한 사실은 결코 그녀에게 갚을 수는 없다는 사실 뿐인데. 기차에서 이름과 사는 도시를 기억했다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국제 우편으로 빚을 갚는 식의 낭만적인 일화도 만들어낼 리도 만무하다. 


방법은 하나다.


다른 사람에게 대신 갚는 것 뿐이었다. 언젠가 여행이 끝나서든, 나이가 더 많이 들어서든, 돌아 돌아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이 16유로와 그의 이자를 '이유없이' 기꺼이 꺼내는 것이다. 알고서도 16유로를 내준, 독일 여성의 호의처럼.  


그날의 결심은 25살이 되고, 26살이 되고, 29살이 되어서도 내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갚을 수 없는 호의를 받고 그것을 되갚는 일련의 일들에 대해서.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이유 없는 호의를 배풀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나는 그녀에게 돌려줄 수 없는 빚을 어떻게 청산하면 좋을지. 그날의 짧은 소동은 나에게 미약하지만 선명한 부채감이자, 해결해야 할 숙제처럼 남았다.  





밥 사주는

사람들


 

그냥 도와주는 사람, 하면 떠오르는 지인이 한명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내가 몸 담고 있던 교지편집부에는 참 야무지고 엄격해한, 1학년 터울의 동아리 회장 언니가 있었다. 하필이면 그 언니를 잇는 다음 회장으로 내가 선출이 되면서 우리의 인연은 돈독해졌는데, 타고나기를 호방한 리더의 그릇을 가진 그 언니에 비해 다소 차분하고 개인주의적인 면이 있던 나는 분명 다른 스타일로 동아리를 운용해 나가게 됐다. 


그래서 그랬는지, 교지를 만들며 각 테마 별로 맛깔 나는 이야기를 써내고 기사를 윤문하는 일은 내게 굉장히 즐거운 일이었음에도 이와 별개로 동아리 회원들을 통솔하는 일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1년 동안 여름 MT, 졸업생 환송, 축제 준비와 동아리의 크고 작은 모임 개최 등 일련의 회장의 할 일 들은 하나 같이 쉽지 않았다. 


16살의 나는 깨달았다. "리더는 역시 귀찮은 일이야."


그런데 그 귀찮은 직함을 즐겼던 선배는, 그 귀찮은 직함을 어쨌든 잘 해보려고 고군분투 했던 후배에게 졸업 후에도 좋은 '선배'를 자처해주었다. 그 언니가 대학교 첫 겨울 방학을 맞이하고 내가 수능을 막 끝냈을 때도, 그 언니가 어느 유명한 화장품 회사에서 인턴을 하고 내가 아직 대학생일 때도, 그리고 그 언니가 어느 잡지 출판 회사에 들어가서 내가 아직 인턴일 때와 그 언니가 사업을 시작하며 대표가 되고 내가 다른 회사에서 대리를 달았을 때도, 그녀는 늘 먼저 나를 불러내어 한결같이 밥을 사주곤 했다. 


치킨, 차슈 덮밥, 쌀국수, 파스타 ... 식사를 다 하고 카페로 이동을 하더라도 항상 먼저 열리는 것은 그녀의 지갑이었다. 그녀는 내가 계산을 할라치면 항상 '니가 왜 내~? 참나 웃기네~?' 하는 대장의 말투로 모든 식사와 커피를 자기가 사곤 했다.


어느날은 그녀에게 얻어 먹은 치킨과, 차슈 덮밥과, 쌀국수와 파스타를 생각하며 물었다. 왜 언니가 맨날 사느냐고. 언니는 심드렁하게 자기 고백을 들려줬다.


자기가 학생일때, 인턴일때, 그리고 저연차 사원일때 항상 자신보다 사정이 더 나은 선배들이, 언니들이 자기에게 밥을 '그냥' 샀노라고.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아직도 자기에게 밥을 '그냥' 사주는데, 그들이 언젠가 그런말을 한적이 있다고. 


"내가 언니라서 사야지' 라는 마음으로 산게 아니야. 

다른 언니들에게, 선배들에게, 받은 것을 그저 동생들에게 돌려주는 거야. 

너도 내게 갚지 말고, 받은 것을 돌려줄 때는 낮은 곳에 돌려주면 돼."


언니는 그 말이 너무 멋있었단다. 


"그러니까 너도 됐고, 그냥 먹어. 나한테 갚을 생각하지 말고 너도 나중에 네 후배들한테 밥 사주면 돼."

 




젊은날

늘어나는

빚에 대하여


나는 과연, 잘 갚고 있을까? 아직 남았을까?


어리고 젊어서 다양한 호의의 채무자가 되는 일은 행운이다. 누구나 같은 양과 빈도로, 세상의 선의를 경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빚을 갖고 갚고 또 다시 얻어 가며 살아가는 인생은 얼마나 감사한가. 단 돈 몇푼, 여러번의 식사만이 빚이겠는가.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받았던 사랑의 기억은 어떠한가. 

 

세상 사람들은 누구라도 손해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게 단 돈 1유로라 할지라도 효용 없는 지출은 없다. 물론 나를 도와줬던 독일 여성이 애초에 그렇게 대단하게 호방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열차의 소란을 마무리 하기 위해 돈을 꺼냈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호의는 돌고 돈다. "


- 100% 손해인 것을 알면서도 '그냥' 도와주는 것은 어디서 오는가? 라는 나의 질문의 대답은 그줄이었다. 


내가 받은 것을 또 다시 다른 사람에게 돌려줄 때. 호의는 크고 작은 도돌이표를 따라 돌고 돌고, 또 돈다.


먼 훗날, 타고나기를 이타적이지 않은 내가 누군가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푸는 일이 혹시라도 생긴다면, 나는 차마 생색내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여행에서, 그 이전과 이후의 일상에서, 받은 것을 되갚는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할테니까. 이 모든 빚들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면, 살아가는데 '어쩐지 내가 손해잖아'라고 생각드는 날들은 훨씬 더 적어지겠지.



 

배낭은 언제나 해피무브 Happy 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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